우리는 사물이나 경험을 기억하는 능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잊어 버리는 부족함도 가지고 있다. 혹자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잊을 수 있다는 것이 인생에는 꼭 필요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때로는 건망증, 그 잊어버림 때문에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도 한다.
건망증이 내 인생에 끼친 가장 커다란 영향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거의 1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학교로 돌아간 "사건"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제법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대학을 들어가자 곧 나는 공부에 취미가 없다는 것과, 세상에는 공부 말고도 해볼 가치가 있으면서도 재미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부는 나보다 조금 더 머리가 좋고, 조금 더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고, 조금 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두고 나는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 공부가 얼마나 힘들고 따분한 일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5년의 세월동안 나는 대학에서 겪은 소중한 경험을 깜박하고 대학원을, 그것도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미국에 도착해서, 다시 학생의 신분으로 강등(?) 된 후에야 나는 학생시절이 얼마나 춥고 (LA는 비록 날씨는 따듯했으나 마음은 추웠던 듯 하다) 배고픈 시절인지,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인지, 그리고 또 얼마나 정신을 괴롭히는 활동인지를 다시 돌이켜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2002년 당시 USC는 Business School에 엄청난 투자를 하여 Warton으로 부터 교수진을 영입해오고 있었으며 2001년 비즈니스 스쿨 랭킹에서 15위 권에 진입(arch-rival인 UCLA와 한끝 차이로 좁히고), 기세가 등등했었다. 상승세를 타고 10위권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학생들을 격려(혹은, 들볶음?)하던 차였다. 특히 1년간은 27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4개의 반으로 나누어 마치 고등학생처럼 시간표를 짜주며 하드트레이닝을 시켰다. Marketing, Strategy,Statistics, Accounting, Corporate Finance, Economics등등의 과목들을 한학기에 모두 배웠다. 미국 대학들의 교육방식이 그렇지만 팀별로 나누어 그룹 프로젝트, 시험등등의 일정이 끝없이 이어졌다. 보통 한 과목당 1주일에 읽어야 할 분량이 100페이지 정도 되었다. 그것도 영어로 말이다. @#$%!!
나는 USC Marshall School of Business (미국 대학들의 단과대학에는 보통 기부자나 공헌자의 이름을 따서 대학의 이름을 붙이는데 USC의 경영대학을 Marshall School이라고 부른다) Class of 2004 (우리나라는 입학년도를 기준으로 00 학번을 따지지만, 미국에서는 졸업연도를 기준으로 'Class of Year'로 부른다. 2002년 8월에 입학한 나는 2004년 5월 졸업이므로 Class of 2004에 해당한다) 270여명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키도 작은 동양계 여자가 기도 못펴고 다니니 아무도 내가 가장 연장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건망증을 한탄하며 한 학기를 책에 푹 파묻혀 있던 내가, 다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시 대학 시절로 돌아가 공부 보다 더 재밌는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서 부터 였다. 한때는 그것이 골프였고, 또 그 덕에 미국에서 겁없이 사업을 시작했던 또다른 무모함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잊고, 또 잊혀지는 것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것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인생의 순간 순간에 느꼈던 그 많은 어려움들을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해낸다면, 어떻게 순간 순간의 무모한 결심들을 해낼 수 있을까 말이다. 그 무모함 덕에 우리는 또 많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을...

<Hollywood의 한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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