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데, 사실 저는 주위에 여자친구들이 별로 없습니다. 대학대까지 몇 남아있던 친구들이 시간이 갈수록 결혼하고 아이 가지면서 집 중심으로 살다보니, 가끔 전화는 해도 만나기 어렵게 되었고 일부 해외에서 자리잡은 친구들도 있다 보니 점점 그 수가 적어졌습니다.
사회생활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시다시피 기자로 오랜 세월 훈련 받다보니, 본성과는 다르게(?) 반 머슴아가 되어 갔죠. 저는 요즘도 사고방식이 '아저씨'스럽지, 결코 '아줌마'스럽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제 또래의 아줌마들 많은 자리에서는 주눅이 들어(마치 40대 아저씨가 그런것처럼) 말도 제대로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우리나라의 유명한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잠시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는 민순기님(평소는 '아줌마', 혹은 '언니'라고 부르지만...)은 제게는 몇 안되는 여자 친구입니다. 미국행을 앞두고 송별회(?) 겸해서 수다를 떨어 보았습니다.
정많은 선배는 '육아'를 택했다
순기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전자신문에서 였다. 전자신문 6기로 입사한 내게 '3기'의 타이틀을 가진 '민순기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같은 존재 였다. 하늘 같은 선배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전자신문은, 적어도 내가 입사했던 88년만 하더라도, 마치 대학 동호회 스러운 정겨움이 남아있는 조직이었다. 선후배간에 서로 챙겨주고, 놀러 다니고 개인적인 고민도 자주 나누는.. 그런 곳이었다. 분위기 좋은 회사에서 만난 덕에 민언니와 난 함께 탁구치러 다니고 술마시러 다니고, 또 지리산 종주도 다니며 상당한 우애(?)를 쌓을 수 있었다.
당시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불과 몇년 되지 않은데다 결혼해 아이까지 둔 여성으로써 우리는 줄곧 '전업주부'의 여유로운 삶을 꿈꾸었다. 아침에 원두커피 내려 마시며 음악 들으며 책읽을 수 있는 '잉여로운'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것이 우리 잡담의 주요 주제 였다. 직장생활과 가사 노동(아무리 최소화한다고 하여도..)을 해내야 하는 어려움, 거기에 아들 키우는 고단함까지 고민 거리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였을 지언정, 결코 용기내어 선택하지는 못했는데, 민언니는 나와 달랐다. 지방대학으로 발령받은 남편따라 제천으로 이사가며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다. 더욱 부러운 것은 이쁜 딸도 낳았다. 한번은 전자신문 여기자들끼리 제천으로 내려가 그녀의 전업주부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우리가 점심 먹고 수다떨며 동경하던 '꿈같은 생활'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안에서도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만은, 어쨌든 민언니는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다시 만나 드림 커뮤니케이션즈의 동지로..
그러던 민언니와 다시 만난 것은 96년. 둘째 아이까지 어느 정도 키워놓은 그녀는 이번에는 다시 용기를 내어 남편과의 '주말부부' 생활을 감수하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권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렇게 할 일을 찾다가, 마침 창업을 앞두고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던 나와 만났다.
기자를 했던 경험 이외에는 홍보일을 해본 적 없던 우리 둘은 '다른 방법'으로 회사를 세팅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선후배에서 창업 동지로 함께 일했던 그녀와 나는 대단히 궁합이 잘 맞았다. (물론 민언니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하루 하루 무언가를 배운다는 뿌듯함을 추구하는 것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당장 눈 앞의 이익 보다는 좀 더 명분있고 멋진일을 해야한다는 기본적인 방향을 공유했기 때문에, 회사의 방향에 대한 커다란 이견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둘은 성격면에서는 서로 달랐다. 일상적인 면에서 나는 굉장히 성격이 소심하고 생각이 복잡하고, 처음 본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어떤 일에 대해 몇 수 앞을 보고 마음이 놓여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는 성격이었던 반면, 그녀는 낙관적이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좋았다.
드림 커뮤니케이션즈 직원들은 사장인 나는 늘 차갑고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로 느껴졌을 터이고 '민이사님'은 편하게 집안 얘기 터놓을 수 있는 푸근한 존재였을 것이다.
민언니와 나, 그리고 아르바이트생 세명이 시작한 회사는 3~4년 만에 40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말은 쉬워서 '빠른 시간에 고속성장'이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성장까지의 순간 순간의 아픔과 어려움은 늘 있었다. 심지어 회사가 매출이 늘고 고객이 늘어나는 순간에도 늘 고민거리와 우리가 풀어내야 하는 숙제는 한아름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함께 했으니 언니와 나는 흡사 전쟁을 함께 겪은 전우의 우정에 버금가는 신뢰와 정을 쌓았을 것이다.
2002년 내가 만든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했을때, 아마 민언니는 누구 보다도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터이지만, 결국은 내 용기를 격려해주었다. 속으로는 약간의 배신감(?)과 혼자 남겨지는 것같은 두려움도 있었을 테이지만 말이다.
"아들 둔 죄"를 호소하는 엄마들의 넋두리
한때는 매일 얼굴 맞대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던 사이었지만 민언니와 나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어언 십여년이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지금도 늘 안부를 챙기고 몇달에 한번씩은 밥 먹는 자리를 꼭 만들어 얼굴을 확인하며 산다.
신문사 선후배와 함께 회사를 일구어낸 동지라는 유대감 이외에도 그녀와 나는 또다른 험난한 길을 서로 위안하며 넘겼기 때문이다. 큰 아들이 중학교 2, 3학년을 거치며 한창 반항기에 접어들어 갖은 '사고'를 칠때, 아들 키우는 어려움을 함께 나눈 사람도 민언니였다. 우리 애보다 한살 위였던 언니의 아들도 성격이 예민하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대안학교인 이우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는 둘째치고 약간의 우울증으로 괴로워 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와 언니의 아이는 서로 아주 다른 이유로 엄마의 속을 썩였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우리의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들을 둔 엄마가 갖는 안쓰러움과 속상함은 이루 표현을 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누기도 어려운 괴로움 이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메신저로 서로 아들들의 상태를 이야기 하며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면서 늘, '풀빵장사를 하더라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부모의 욕심 때문에 하기 어려운 원칙들을 다시 마음 속에 새기곤 했다.
이제 언니의 아들도 마음을 잡고 일본 유학을 시작했고, 민언니는 부군과 함께 안식년 휴가를 떠난다. 새로운 곳에서의 경험이 또 다른 희망과 즐거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에도 많아야 일년에 서너번 밖에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먼 곳으로 간다고 하니,문득 내 주변에 여자친구의 희소성을 느끼며 그녀의 소중함이 백만배쯤 실감이 났다.
'이지선과 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 시대의 비저너리(Visionary), 손정의 회장을 좋아하는 이유 (1) | 2011/06/20 |
|---|---|
| '진보집권 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의 소셜(Social) 스러운 맛 (0) | 2010/11/19 |
| 이지선과 사람들 ③ 몇 안되는 '여자'친구와의 깊은 인연 (2) | 2010/08/03 |
|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2) | 2010/07/03 |
| 이지선과 사람들 ② 내 인생 멘토에게 듣는 코칭 이야기 (5) | 2010/06/14 |
| 이지선과 사람들 ① 민서와 동현에게 배우는 꿈과 희망 (0) | 2010/05/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