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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0/08/21 '파리의 심판'을 이끈 나파의 대표주자 - 샤토 몬텔리나(Chateau Montelena) (2)
  2. 2010/08/16 나파밸리 대표주자,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4)
  3. 2010/08/15 정갈하고 고즈넉한 Napa Valley, 그 품에 안기다. (5)
  4. 2010/08/14 쏘멕(SoMeC), 잔치는 시작됐다. (8)
  5. 2010/08/11 와인을 그리다! (4)
  6. 2010/08/03 이지선과 사람들 ③ 몇 안되는 '여자'친구와의 깊은 인연 (2)
나파밸리에는 와이너리가 450여개나 된다고 한다. 그 많은 와이너리 중에 어디를 들러봐야 할까하는 선택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명한곳, 잘아는곳, 이름이 멋져 보이는 곳, 여러가지 기준이 있겠지만 나의 'CANNOT MISS' 리스트에 들었던 와이너리가 있다. 바로 샤또 몬텔리나(Chateau Montelena) 와이너리.


샤또 몬텔리나는 나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칼리스토가(Calistoga)라는 타운에 자리잡고 있다. 대단히 고풍스럽고,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역시 유럽도 거의 못가보고 이런 얘기를 하는게 웃기지만...) 곳이다. 게다가 와이너리 이름도 나파밸리의 다른 곳과 다르다.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라든지, 베린저(Beringer)라든지 흔히 사람의 이름을 딴 곳과 달리 프랑스 보르도식으로 '샤또 몬텔리나'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이런 저런 면에서 보르도 와이너리의 느낌이 나는 이곳은 사실, 보르도의 샤또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나파밸리 와인의 자존심을 세운 '파리의 심판'을 이끌어낸 주인공 가운데 하나였다. '파리의 심판'은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와인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를 지칭하는 말이다. 당시 프랑스의 와인생산업자와 소물리에, 와인비평가들이 참가해서 프랑스와 캘리포니아의 레드, 화이트 와인을 가지고 블라인드테스트를 한 결과 레드, 화이트 와인 모두 미국의 나파 와인을 최고로 손꼽았다.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프랑스 와인이 신생 와인 생산국인 미국에 크게 참패한 이례적인 '사건'이 되었다. 

파리의 심판에서 화이트와인으로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샤또 몬텔리나의 샤도네이였다. 샤또 몬텔리나의 감동적인 스토리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바로 '와인 미라클(원제: Bottle Shock)'이라는 영화다.


샤또 몬텔리나 와이너리에는 파리의 심판의 주인공 Chateau Montelena Chardonnay 1973 병과 영화 장면들이 전시되어 있다. 시음을 하면서 직원에게 영화가 너무 감동적이었다고 얘기를 건넸더니 아무래도 영화인 만큼 'fiction'의 요소가 첨가되었다며 웃었다. 내가 시음했던 Chardonnay는 2008년산이었는데, 솔직히 세상을 놀라게 할만큼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샤도네이가 좀 crispy한 느낌이었는데 2차발효때 오크통에 넣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했다. 



상식과 고정관념을 뛰어 넘는 곳에 혁신이 있다. Innovation은 세상을 한걸음 앞으로 내딛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혁신을 원한다. 아마 내가 샤또 몬텔리나 와이너리를 꼭 가보고 싶었던 것은 그 혁신의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물론 와이너리에는 없었다. 샤도네이 병과 영화 포스터만으로는 그 에너지를 느끼기 어려웠다. 오히려 샤또 몬텔리나의 분위기는 '혁신적'이라기 보다는 '전통적'이었다. 혁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풍적인 곳이랄까... 

 
와인과 치즈 l 2010/08/21 18:12

어디에나 '대표'는 있다. 세상을 떠난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우리 기억속에 팝의 황제로 기억되는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있고, 국내 가요의 작은 거인 조용필이 있다. 얼마전 PGA 챔피언쉽 경기에서 굴욕적인 성적을 거뒀지만 여전히 타이거 우즈(Tiger Woods)가 골프계의 '대표주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저런 단점이 있어 보여도 대표주자가 갖는 상징성과 품격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전세계적인 와인 생산지인 미국 나파밸리(Napa Valley)의 대표주자가 누구냐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Robert Mondavi Winery)라 답할 것이다. 나파밸리 와인투어 첫 와이너리로 오퍼스원(Opus One)도 아니고 단연 로버트 몬다비를 손꼽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크빌(Oakville)에 위치한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 좌회선 차선에 내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 입구 표지판을 찍고 싶었던 것은, 얼마전 읽었던 로버트 몬다비 자서전을 통해, 그가 52세에 새롭게 시작한 '벤처'였던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가 몬다비 자신에게, 혹은 나파밸리 자체에도 얼마나 중요한 의미였는지가 되새겨 졌기 때문이었다.

몬다비 가문은 이태리에서 이민 온 1세대에 의해 와인 만들기가 시작되었고 2세대인 로버트 몬다비는 동생과 챨스 크룩(Charles Krug)이라는 와이너리를 운영해왔다. 그런데 로버트 몬다비는 프랑스 와이너리를 방문한 후에 나파밸리에도 보르도식 와인 제조 기법을 연구하고, 도입하고 마케팅이나 브랜딩에 신경을 쓰면 세계적인 와인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몬다비가 만들어 내었으면 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그 꿈은 동생과 함께 경영하는 챨스 크룩에서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생각이 다른 동생과의 불화로 52세에 자신만의 꿈에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이다.


로버트 몬다비의 꿈 속에는 와인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기술적인 진보도 있었지만, 와이너리를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만들고 와이너리 관광을 통해 와인과, 세계적인 수준의 나파의 힘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는, 일종의 '브랜딩(Branding)'에 대한 고민도 묻어 있었다. 그래서 와이너리를 시작할 때도 관광수요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나파밸리에서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가 대표적인 명소로 손꼽히는 이유도 바로 창업자의 이런 욕심과 비전이 와이너리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1966년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가 창업될 때만 하더라도 나파밸리는 그저 와인을 주업으로 하는 시골 마을이었고 미국에서 조차 와인 인구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로버트 몬다비는 프랑스 보르도 등을 둘러 보면서 나파밸리의 와인이 세계적인 와인과 겨룰 만큼 품질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제조기법이나 마케팅 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50대에 새출발한 로버트 몬다비는 나파의 다른 와인메이커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여러가지를 테스트하며 나파밸리의 새로운 역사를 써냈다. 그 한예가 프랑스 보르도 5대 샤또 가운데 무똥 로칠드를 만드는 가문과 손잡고 나파밸리의 명품와인 '오퍼스원(Opus One)'을 런칭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새로운 시도들로 세계적인 브랜드의 와인을 만들어 내며 로버트 몬다비는 성장했고, 나파밸리의 '대표주자'로 견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몇군데 와이너리를 돌아 보면서 느낀 점은, 물론 셀러나 제조과정 투어를 못해보아서 아쉽지만, 적어도 와이너리의 장식이나 분위기, 혹은 기념품샵 만으로만 본다면 로버트 몬다비가 단연 뛰어났다. 똑같은 아이템 (모자, 와인 스쿠루, 지도, 티셔츠 등등)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데도 로버트 몬다비 제품이 훨씬 '사고 싶은' 욕구를 자아내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이긴 하지만 말이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에는 이제까지 와이너리가 걸어온 길이 연대기별로 잘 설명되어 있다.


시음코너 밖에 펼쳐진 잔디밭이 잘 정돈되어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즐겨 마시던 카버넷 쇼비뇽 (Carbernet Sauvignon) 포도를 직접 보았다는 것!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에서 열매가 익어가는 카버넷 쇼비뇽이었다. 포도알은 우리가 보통 먹는 캠벨에 비해 절반이하로 아주 작았다. 포도알이 작으면 그만큼 농축적인 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포도주를 마실때면, 이 포도를 재배하던 곳의 모습은 어떨까, 이 포도가 열릴때 그곳에선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혹은 내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사이드웨이즈'이 여주인공 마야의 대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지만...)를 생각하곤 했었는데, 내가 직접 본 저 포도가 더 영글어서 포도주가 되고 그것을 내가 편안하게, 즐겁게 마실 날을 생각하니, 마치 미래 공상 영화를 본 것처럼, 미래가 기대된다!


와인과 치즈 l 2010/08/16 18:10


평소에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와이너리 투어는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 확트인 포도원을 바라보며 잘 꾸며진 곳에서 와인 테이스팅도하고 여러가지 와인 용품들도 구경하고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와인을 좋아하는 '관심'까지 더해지면 그 신기함과 감격 스러움이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세계적인 와인산지인 '나파 밸리(Napa Valley)'로 와이너리 투어를 간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럴 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여름에 LA에 갔을때 사실 나파까지 올라갔다 오는 것은 조금 무리였다. LA에서 Napa까지는 자동차를 타고가면 (편도만으로) 못잡아도 10시간은 걸리는 먼거리였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내 인생의 Bucket List(죽기전에 꼭 해보고 싶은일)에 올라있는 것이었기에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감행을 했다.

나파밸리(Napa Valley)는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29번 도로와 실버라도 트레일(Silverado Trail)이라는 양쪽 길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남쪽에서 올라갈 경우를 기준으로 나파밸리 초입에 나파(Napa), 욘트빌(Yountville), 러더포드(Rutherford), 오크빌(Oakville), 세인트헬레나(St. Helena), 칼리스토가(Calistoga)와 같은 작은 마을들이 이어져 있다. 이 마을들에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와이너리들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포도들이, 그 와인들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 곳이었다.

나파밸리에 도착해서 욘트빌(Yountville)에 하루 묵었는데 작은 마을이 정갈하게 잘 가꾸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파밸리 전체가 고즈넉하고 깔끔하고 정갈하고, 그래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욘트빌에 있는 식당들은 대도시에 있는 어떤 곳에 비해서도 밀리지 않을 만큼 (크기는 작을 지언정), 깔끔했다.


나파 여행중 묵었던 욘트빌은 나파 밸리의 오늘을 개척한 조지 칼버트 욘트의 이름에서 마을명을 딴 곳이었다. 나파밸리 역사 안내에 보면 1838년 조지 욘트가 나파밸리에 와서 통나무집을 짓고 포도를 심기 시작하면서 이곳을 와인의 고장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곳은 나파밸리의 초기 시절 와이너리였던 곳있데  지금은 개장해서 레스토랑과 샵들이 들어서 있다.


유럽을 가본 적이 없으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우습지만, 욘트빌은 자그마한 유럽의 마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랄까, 고풍스러우면서도 목가적인 아름다움이 살아있다는 느낌이랄까.


이 곳은 욘트빌에서 묵었던 Four Sisters Inn - Madam Florie라는 작은 부티크 호텔이었다. 프랑스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게스트룸도 많지 않고, 호텔 투숙객을 그야말로 '손님'처럼 대하는 곳이었다. 식당에 와인과 치즈/크랙커를 놓아두어 맘대로 즐기게 해주었고 호텔 종업원이 많지 않은 대신 열쇠를 가지고 이곳 저곳을 편리한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큰 도시의 호텔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나파밸리에 도착한 첫째날에는 시간이 늦어 와이너리 투어는 하지 못하고 욘트빌을 거닐다가 좋은 와인(Cornerstone - Howell Mountain Carbernet Sauvignon 2005) 한병 사서 코키지가 무료라는 식당을 찾아 마셨다.


늘 와인 레이블에서만 보았던 바로 그곳에 내가 와있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밀려들었다.

와인과 치즈 l 2010/08/15 10:50

소셜미디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활용도도 증가되고 있어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모임을 가져 보자는 취지에서 쏘멕(SoMeC)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쏘멕 함께 하시겠습니까? 참고)

5명의 Team 1이 출발하여 7월 한달 동안 자신의 과제를 정하고 이런 저런 실험을 통해 소셜 미디어를 몸으로 부딪치며 배우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자발적으로, 스스로 공부하는 모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기간은 있어야 하고 얻을 것을 정리하는 자리는 있어야 겠기에, 어제 SoMeC Team1의 정리 파티를 했습니다.


정리 모임은 미디어유 근처 카페에서 진행이 되었는데요 샌드위치와 음료, 피자, 와인등을 앞에 두고 한 맛있고 유쾌한 시간이었습니다.


행사준비와 사회를 맡은 김현철님이 SoMeC의 경과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음료 주문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서 이승경님이 '46일간의 블로그 기록'을 발표하고 계십니다. SoMeC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셔서 많은 실험들을 하면서 배운 것들을 나누고 계십니다. 46일만에 일평균 방문자 700-800명에 이를 정도로 블로그를 활성화 시키셨다니 놀라운 힘이라고 보여집니다. 특히 이승경님은 트위터도 SoMeC이후 처음 개설하셔서 팔로워수 2천명을 넘길 정도로 열심히 소셜 미디어에 빠져 지내고 계십니다.


다음은 배운철님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하는 기업들을 위한 온라인 모니터링에 대해 발표해주고 계십니다. 온라인 모니터링을 왜 해야하는지, 어떤 요소들을 모니터링 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떤 툴들이 나와있는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벌써 창문밖이 어둑어둑 해지고 있습니다.

두 분의 발표와 질문,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그렇게 SoMeC 파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러나 SoMeC의 잔치는 이제 막 시작이 된 느낌입니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스터디가 운영될 수 있도록 Team2, 3을 이어서 꾸려가면서 보다 많은 소셜 미디어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채곡채곡 쌓일 수 있도록 정돈하겠습니다.

Team1으로 활동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강의와 책 l 2010/08/14 07:49

이번 휴가 기간중에 조금 무리해서 나파밸리를 다녀왔습니다. 나파밸리 욘트빌(Yountville)에서 묵었는데 도착해서 욘트빌 동네를 이곳 저곳 다녀보았습니다. 욘트빌은 나파밸리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곳인데 사실상 '번화하다'라는 표현 보다는 작고 아담하고 평화로운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마을 상점마다 유독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는데, 세계적인 와인 산지 답게 와인을 그린 그림들이 많았습니다. 그림 만으로도 와인의 맛과 향이 전해지고 나파의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느낌이 전해지더군요.


와인의 느낌을 색으로 표현한 그림입니다. 사진으로 찍어 놓으니 실제 그림을 보는 감동만은 못하지만 와인이 전해주는 다채로운 맛과 느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


포도밭과 휴식과 산책이 곁들여진 그림들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마치 사진처럼 선명하게 그려진 그림은 입안 가득이 침이 고이게 만들더군요.

나파에는 와이너리가 있지만, 그 와이너리들은 나파의 생활이자 문화이자 휴식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을 하는 것이 생활이면서 동시에 문화이며 휴식이었으면 참 좋겠구나... 하고 생각했더랍니다.

와인과 치즈 l 2010/08/11 11:21


Prologue
고백하건데, 사실 저는 주위에 여자친구들이 별로 없습니다. 대학대까지 몇 남아있던 친구들이 시간이 갈수록 결혼하고 아이 가지면서 집 중심으로 살다보니, 가끔 전화는 해도 만나기 어렵게 되었고 일부 해외에서 자리잡은 친구들도 있다 보니 점점 그 수가 적어졌습니다.
사회생활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시다시피 기자로 오랜 세월 훈련 받다보니, 본성과는 다르게(?) 반 머슴아가 되어 갔죠. 저는 요즘도 사고방식이 '아저씨'스럽지, 결코 '아줌마'스럽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제 또래의 아줌마들 많은 자리에서는 주눅이 들어(마치 40대 아저씨가 그런것처럼) 말도 제대로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얼마전까지 우리나라의 유명한 대안학교인 이우학교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잠시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는 민순기님(평소는 '아줌마', 혹은 '언니'라고 부르지만...)은 제게는 몇 안되는 여자 친구입니다. 미국행을 앞두고 송별회(?) 겸해서 수다를 떨어 보았습니다.

정많은 선배는 '육아'를 택했다

순기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전자신문에서 였다. 전자신문 6기로 입사한 내게 '3기'의 타이틀을 가진 '민순기 선배'는 그야말로 하늘같은 존재 였다. 하늘 같은 선배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전자신문은, 적어도 내가 입사했던 88년만 하더라도, 마치 대학 동호회 스러운 정겨움이 남아있는 조직이었다. 선후배간에 서로 챙겨주고, 놀러 다니고 개인적인 고민도 자주 나누는.. 그런 곳이었다. 분위기 좋은 회사에서 만난 덕에 민언니와 난 함께 탁구치러 다니고 술마시러 다니고, 또 지리산 종주도 다니며 상당한 우애(?)를 쌓을 수 있었다.
 
당시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불과 몇년 되지 않은데다 결혼해 아이까지 둔 여성으로써 우리는 줄곧 '전업주부'의 여유로운 삶을 꿈꾸었다. 아침에 원두커피 내려 마시며 음악 들으며 책읽을 수 있는 '잉여로운'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것이 우리 잡담의 주요 주제 였다. 직장생활과 가사 노동(아무리 최소화한다고 하여도..)을 해내야 하는 어려움, 거기에 아들 키우는 고단함까지 고민 거리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였을 지언정, 결코 용기내어 선택하지는 못했는데, 민언니는 나와 달랐다. 지방대학으로 발령받은 남편따라 제천으로 이사가며 과감하게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의 길을 택했다. 더욱 부러운 것은 이쁜 딸도 낳았다. 한번은 전자신문 여기자들끼리 제천으로 내려가 그녀의 전업주부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는데, 그야말로 우리가 점심 먹고 수다떨며 동경하던 '꿈같은 생활' 그 자체였다. 물론 그 안에서도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만은, 어쨌든 민언니는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다시 만나 드림 커뮤니케이션즈의 동지로..

그러던 민언니와 다시 만난 것은 96년. 둘째 아이까지 어느 정도 키워놓은 그녀는 이번에는 다시 용기를 내어 남편과의 '주말부부' 생활을 감수하고 아이들과 함께 서울권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렇게 할 일을 찾다가, 마침 창업을 앞두고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던 나와 만났다.

기자를 했던 경험 이외에는 홍보일을 해본 적 없던 우리 둘은 '다른 방법'으로 회사를 세팅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선후배에서 창업 동지로 함께 일했던 그녀와 나는 대단히 궁합이 잘 맞았다. (물론 민언니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둘은 공통점이 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하루 하루 무언가를 배운다는 뿌듯함을 추구하는 것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당장 눈 앞의 이익 보다는 좀 더 명분있고 멋진일을 해야한다는 기본적인 방향을 공유했기 때문에, 회사의 방향에 대한 커다란 이견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우리 둘은 성격면에서는 서로 달랐다. 일상적인 면에서 나는 굉장히 성격이 소심하고 생각이 복잡하고, 처음 본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어떤 일에 대해 몇 수 앞을 보고 마음이 놓여야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있는 성격이었던 반면, 그녀는 낙관적이고 사람들과의 친화력이 좋았다.

드림 커뮤니케이션즈 직원들은 사장인 나는 늘 차갑고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로 느껴졌을 터이고 '민이사님'은 편하게 집안 얘기 터놓을 수 있는 푸근한 존재였을 것이다.

민언니와 나, 그리고 아르바이트생 세명이 시작한 회사는 3~4년 만에 40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를 키웠다. 말은 쉬워서 '빠른 시간에 고속성장'이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성장까지의 순간 순간의 아픔과 어려움은 늘 있었다. 심지어 회사가 매출이 늘고 고객이 늘어나는 순간에도 늘 고민거리와 우리가 풀어내야 하는 숙제는 한아름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함께 했으니 언니와 나는 흡사 전쟁을 함께 겪은 전우의 우정에 버금가는 신뢰와 정을 쌓았을 것이다. 

2002년 내가 만든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했을때, 아마 민언니는 누구 보다도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느꼈을 터이지만, 결국은 내 용기를 격려해주었다. 속으로는 약간의 배신감(?)과 혼자 남겨지는 것같은 두려움도 있었을 테이지만 말이다.   

"아들 둔 죄"를 호소하는 엄마들의 넋두리

한때는 매일 얼굴 맞대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던 사이었지만 민언니와 나는 서로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어언 십여년이 다 되어간다. 그럼에도, 지금도 늘 안부를 챙기고 몇달에 한번씩은 밥 먹는 자리를 꼭 만들어 얼굴을 확인하며 산다. 

신문사 선후배와 함께 회사를 일구어낸 동지라는 유대감 이외에도 그녀와 나는 또다른 험난한 길을 서로 위안하며 넘겼기 때문이다. 큰 아들이 중학교 2, 3학년을 거치며 한창 반항기에 접어들어 갖은 '사고'를 칠때, 아들 키우는 어려움을 함께 나눈 사람도 민언니였다. 우리 애보다 한살 위였던 언니의 아들도 성격이 예민하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대안학교인 이우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는 둘째치고 약간의 우울증으로 괴로워 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와 언니의 아이는 서로 아주 다른 이유로 엄마의 속을 썩였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우리의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아들을 둔 엄마가 갖는 안쓰러움과 속상함은 이루 표현을 하지 못한다.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면 나누기도 어려운 괴로움 이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메신저로 서로 아들들의 상태를 이야기 하며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그러면서 늘, '풀빵장사를 하더라도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부모의 욕심 때문에 하기 어려운 원칙들을 다시 마음 속에 새기곤 했다. 


이제 언니의 아들도 마음을 잡고 일본 유학을 시작했고, 민언니는 부군과 함께 안식년 휴가를 떠난다. 새로운 곳에서의 경험이 또 다른 희망과 즐거움이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에도 많아야 일년에 서너번 밖에는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먼 곳으로 간다고 하니,문득 내 주변에 여자친구의 희소성을 느끼며 그녀의 소중함이 백만배쯤 실감이 났다.



이지선과 사람들 l 2010/08/0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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